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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600년 명나라에 대한 사대주의는 왜 끝내지 못했나?


단번에 이해하는 한국사의 최대 미스테리 사대주의 

(이미 망한 나라에게 200년 넘게 제사를 지낸 전무후무한 조선)

 

 

한국인들이 잘 모르는 역사, 그러면서 중국과 일본의 역사학자들도 도대체 왜 그랬는지 궁금해 하는 것이 바로 조선이 개국하면서부터 멸망할 때까지 계속된 명나라에 대한 사대주의다. 조선의 사대주의는 1392년 이성계가 왕조를 개국하면서 시작된다. 조선이란 국호는 명태조 주원장이 이성계가 제출한 국호 후보인 조선(朝鲜)과 화녕(和寧)중 선택해 준 것이다. 조선은 명나라가 국호를 정해줬다고 해서 줄곧 이를 대조지은(大造之恩)이라고 하고 임진왜란 때 군대를 파견해 왕조의 생명을 한번 구해줬다고 해서 재조지은(再造之恩)이라 불렀다.

 

명나라때의 핵심사상은 주자학이었지만 왕양명이 창시한 양명심학도 나름 번창했다. 조선에 양명학이 전해지자 주자학만을 고집했던 조선의 사대부들은 자신들이 정통을 지키고 있다면서 명나라에 심리적인 우월감을 가지면서도 특이하게도 사대주의는 버리지 못했다. 이런 태도가 결정적으로 바뀐 것은 임진왜란 이후 명청 교체기부터다. 임진왜란때 군사를 일으키는 바람에 국고에 타격을 받은 명나라는 북방 여진족 위협을 끊임없이 받고 있었다.

 

1619년 누르하치는 만력제의 대군을 샤르흐(萨尔浒 지금의 랴오닝성 푸순 부근)에서 크게 격파한 뒤 1627년(정묘호란)과 1636년(병자호란) 두 차례에 걸쳐 조선을 침공한다. 명에서는 조선에 원군을 보내는 방안이 논의됐지만 너무나도 일찌감치 조선은 패배해 삼전도의 굴욕을 당한다. 인조는 청의 황타이지에게 명나라 연호를 폐지하는 동시에 명이 내린 고명칙인(诰命敕印)을 제출하고 청을 섬기기로 한다.

 

이후 인조는 명나라가 별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데도 명에 대해 사죄하고 궁궐에서 명의 황제가 있는 서쪽을 향해 울고 절을 했다. 고도의 유교문명국가로 소중화를 자처하던 조선이 수렵이나 하던 만주족에 굴복하자 조선의 왕이나 사대부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동시에 청나라의 요구가 조선에 부담이 되면서 반청 사조도 생긴다. 이때부터 청나라를 ‘호로’(胡虏)라고 했으니 여기서 ‘호로자식’이란 욕이 유래된 것이다.

 

청나라 황제는 호황(胡皇)이라 했고 청나라 사신은 호로의 사신이라 해서 로사(虏使)라 불렀다. 멸시하면서 조공을 바치는 아리러니한 상황이었다. 조선은 외교문서에는 인조가 황타이지에게 약조한 것처럼 청나라의 연호를 사용했지만 국내용 문서에서는 명나라 숭정의 연호를 사용했으며 특히 조선의 사대부들은 조선이 망할 때까지 2 백여 년 동안 이를 고집했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치르면서 명나라의 유민들 상당수가 조선으로 유입됐다.

 

조선은 명에 대한 의리차원에서 청나라 사신이 오면 이들을 숨겨주고 이주를 시키기도 했지만 때로는 청나라의 압력에 송환하기도 했다. 가장 황당한 사례는 1667년 제주도에 표류한 한족을 청에 송환한 일이다. 정성공이 반청운동을 할 때 존재했던 남명(南明)의 푸젠성 상인 임인관(林寅觀)등 95명이 일본으로 가려다 표류해 제주도에 도착했다. 제주도의 조선관리들은 이들이 변발도 하지 않고 명나라 복장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황통(皇統)이 살아있다”면서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부모의 목소리를 듣는 것 같다”고까지 한다.

 

그러나 이같은 감성적인 장면이 끝나자 조선왕실은 청나라와의 관계를 감안한다면서 이들을 청나라에 송환한다. 이들이 청나라에 압송 당한뒤 참수에 처해졌음은 물론이다. 그러면서도 청에 대한 반감을 나타냈는데 연행록을 보면 조선사신은 명나라 복식을 한다. 반청사상과 명에 대한 사대주의는 숙종때 극에 달한다. 숙종은 임진왜란때 조선을 구해준 명의 신종(神宗)을 모시는 제사를 지내야 한다면서 대보단(大报坛 위치는 창덕궁의 후원으로 지금은 폐허만 남아있다)을 지어야 한다는 얘기를 꺼낸다. 나라 경제가 어려웠던 때라 조정대신 가운데는 호조참판인 권상하만이 숙종의 의견에 찬성하지만 대보단(大报坛)설치 이야기가 소문이 나자 성균관 유생들 160여명이 연명으로 상소문을 올려 신종황제에 대한 제사를 지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쯤 되자 이전에 별 의견을 내지 않았던 대신들로 덩달아 찬성의사를 밝히게 된다. 결국 숙종의 명으로 명나라가 망한지 한 甲子 즉 60년이 되던 해인 1704년 대보단이 지어진다. 제사의식은 명나라 식에 따랐다 제기(祭器)는 대명집례(大明集礼), 신주와 황색장막으로 둘러친 제단은 대명회전(大明会典)을 따랐다. 북벌계획이 한창 논의되던 효종 때와는 달리 숙종때는 청나라가 삼번의난과 반청복명운동을 벌이던 타이완의 정성공 세력을 완전히 제압한 뒤였다. 북벌의지가 제사를 통한 자기만족으로 변질된 것이다.

 

숙종때 신종을 기리는 것도 모자라 영조때는 제사대상을 명태조와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까지 확대한다. 명태조 주원장의 신위를 서쪽에, 신종을 가운데, 숭정제를 동쪽에 배치한다. 매년 한차례 제사를 지내는데 이는 1905년 을사조약 이후인 1908년까지 지속된다. 명나라에 대한 사대를 논하는데 빠질수 없는 인물은 효종때 북벌을 주창했다가 숙종때 사사된 우암 송시열이다. 송시열은 춘추의 존왕양이 사상을 숭배한 노론파의 창시자로 죽기 전 제자인 권상하에게 유언을 남겨 충청도 화양리에 만동묘를 지어 신종과 숭정제의 제사를 지내라고 한다.

 

유학의 여러 파벌 가운데 명나라에 가장 충성하는 파벌은 송시열에서 이항로(李恒老)로 이어진 화서학파(華西學派)다. 이항로는 1836년 송시열의 묘를 참배하고 화양동 만동묘에 들렀다. 그리고는 “承羲黄尧舜禹汤文武孔颜孟朱宋之统绪,绪立五常五伦天地人物之本体,死生不足以动其心,贵贱不足以易其守,古今不足以限其至”라는 글을 남겨 자신이 송시열의 적통임을 강조했다. 조선말기 서구세력이 몰려오자 이항로는 반청에다 반양(反洋)의 이념을 더해 夷洋一体론을 주장한다. 이항로의 화서학파는 위정척사 운동을 벌였던 최익현과 일제 침략과 단발령에 저항해 의병을 일으켰던 유인석이 계승한다.

 

유인석은 의병운동에 실패하고 서간도 지역인 길림성 통화로 건너가게 되는데 이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를 칭하자 이에 반대한다. 명 황제에 대한 대보단의 제사가 공식적으로 금지된 것은 1908년 순종의 칙령에 의해서다. 주자학의 이상주의에 따라 이미 망한 나라의 황제에 대해 200년이 넘도록 제사를 지낸 사례는 세계사에서 조선이 유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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